내가 밥을 먹을 때는 전혀 행복하지 않고, 남에게 밥을 지어줄 때에만 행복을 느끼는 초이타적인 사람은 자신의 것들을 모두 퍼주기만 할 뿐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나의 먹거리를 사수하는 유전자를 장착하고 있다. 즉, 본인의 생존에 가까워지는 행동으로부터 얻는 쾌락신호가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참고2).

그런데 생존이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 생존 대상을 본인으로 한정지어 정의한다면 오해가 생겨날 수 있다. 일례로 수컷 공작새의 커다란 깃은 생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깃이 매우 큰 이유는, 그렇지 못한 수컷들은 모두 죽은 반면 깃이 큰 수컷들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을 ‘개인 유전자의 후대로의 전수’ 라고 정의하자. 이 정의를 앞서 언급했던 ‘이타적인 사람’ 의 예시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자. 배려만 고집하며 숭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은 배굶지 않고 생존할 확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미세하게 낮았고, 수천 자손을 거쳐오며 이러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를 ‘생존하지 못했다’ 라고 표현한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논의에서 행복은 궁극적으로 얻어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from2), 소크라테스, 플라톤 철학에서 강조하는(sup2) 행복이 선이라는 테제(Thesis) 위에 쌓아올린 행복 연구들이 오해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치(from4)도, 도덕(참고1)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행복이나 쾌락이란 가치 추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심리학(from1)의 표현을 빌리면,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력(from3)하면 주어지는 보상이다(참고3)(sup3, to3). 심리적 고통(외로움 등)이나 육체적 고통(팔다리가 부러짐 등)은 생존에서 멀어질 때 주어지는 형벌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본질적이다(sup1). 앞서 생존을 ‘개인 유전자의 후대로의 전수’ 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생각해 보면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남아있을 이유는 딱히 없다. 행복과 쾌락, 이들은 모두 생존-진화-번식의 부산물이지 본질이 아니다(from2).


parse me : 언젠가 이 글에 쓰이면 좋을 것 같은 재료들.

  1. None

from : 과거의 어떤 생각이 이 생각을 만들었는가?

  1. 3__1.2___2. title: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목적이 있는 삶이다. 가치있는 삶과 행복한 삶은 다르다.
  2. 3__1.2.2. title: 모든 시간과 모든 환경에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 그럼에도 타노스보다는 일론 머스크가 낫다.

supplementary : 어떤 새로운 생각이 이 문서에 작성된 생각을 뒷받침하는가?

  1. ba7.6_3.1_2. title: 플라톤은 육체와 욕망에서 벗어나는 철학함을 통해 이데아계의 불완전한 영혼을 다듬을 수 있으며, 올바른 삶의 태도를 통해 생명체로 윤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어떤 삶이 의미있는 삶인지를 심도깊게 다루었다.

opposite : 어떤 새로운 생각이 이 문서에 작성된 생각과 대조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