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소를 바탕으로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어떤 장소에서 누구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기억은 '비자발적 기억' 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이런 비자발적, ‘장소 기반’ 기억, 대학교 1~3학년 그리고 지금까진 잘 작동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내 평생을 책임질 수 있을까? 벌써 지금만 하더라도 누구랑 갔었는지 헷갈려서 여자친구에게 미안해하곤 하지 않는가.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함은 비단 장소뿐 아니라, 어떤 향이나 어떤 소리, 어떤 텍스트나 어떤 감정에 의해서도 떠올려질 수 있는 기억이다 (참고1). 개인이 제어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요소에 의해 떠오른 기억이라 해서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명확한 단어로서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기억을 어떤 장소라는 활용해서 그 때의 상황, 그 때의 장소를 추상적으로 공간에 묻어서 떠올리고 싶은 욕구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비자발적 기억을 장소에 가두어 두는 것이 최근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는 나 스스로 공간에 묶어 둔 공간이 사라지거나, 다른 기억에 의해 훼손된다고 느낄 때(참고2), 혹은 그 순간에 있었던 구체적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분위기만 남아 있다는 것을 친구랑 대화하다가 느낄 때 너무 슬퍼하곤 하는 것 같다.
154p, 156p, 심리학 역사상 가장 신기한 인물. 이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 무엇보다 그는 추상적인 용어로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책 <제텔카스텐> 에는 모든 내용을 머리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짧게 소개한다. 책에는 모든 것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 기억하는 사람의 애환이 나타나 있다. 그런 사람은 공감능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그 순간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어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기억력을 주지 않은 것은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라며 생각은 그물망처럼 연결이 되어 추상화되기에 유의미한것이라고 덧붙인다.
이제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일반적인 암기력은 정해져 있다. 암기력뿐 아니라 던바의 숫자에 의해 인간이 진정한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사람도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도전하고자 했지만 모두가 실패했다. 나는 이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 될 수 없지만, 그 순간의 추상화된 분위기만큼은 기억하려 하고, Google map 의 자동 동선 기록 기능과 캘린더를 활용해서 이런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내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지, 장소에 묻은 기억을 지키기 위함도 아니다. 언제까지나 사람이 먼저다.
당연한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자. 이런 것에 슬퍼하고,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망각은 당연한 것이다. 최고의 영업사원도 사람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어버린다. 내 뇌가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비자발적 방아쇠를 지금보다 조밀히 만들되 효율적으로 구성해 놓자. 이렇게 소중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쉬워하며 이를 간접적으로 극복해보려는 인간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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