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것이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버튼을 누르는 일이라면, 그 버튼을 누르는 방법은 굉장히 원시적일 것이다. 이 원시적인 행동에는 성폭행이나 도둑질처럼 반사회적인 행동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원시적인 본능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원시적인 본능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나는 이것이 개인의 강력한 의지 혹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도덕적 특징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와 법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참고4:뒤르켐의 아노미 이론).

우리가 흔히 인간다움 때문에 어떠하다고 믿는 것들(인간성)이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섬 에란겔이나 드라마 <워킹데드>의 디스토피아처럼, 우리의 도덕적 행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는 인자가 제거된 환경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사회의 존재가 왜 좋은가? 성폭행이나 도둑질이 나쁘다고 규정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 근거란 무엇인가? 이러한 대부분의 의문들이 사회학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사회문화적으로 건전한 토의를 나누기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들이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지만(의문 참조), 사실 나는 현실 세계 속에서 나의 행복을 극대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던 중 <행복의 기원> 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반사회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회의 기대에 역행한다면 아무리 그 생각이 불멸의 진리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행복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사회의 거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된다면 큰 보상을 받고 행복감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으로 공급이 적지만 수요가 많은 스킬을 가진 사람의 몸값이 대체적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from3). 책 <행복의 기원> 에서도 우리가 사회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에 진화적인 요소가 분명히 개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면 장기적으로 생존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from2).

그래서, 고민하는 일을 분리할 것이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각들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첫 번째, 사람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때 행복한 이유가 두 번째이다. 이 글에서는 사람이 왜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는지(사람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때 행복한 이유), 즉 두 번째에 대해서 살펴보고 나아가 21세기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 글을 작성하는 당시에는 첫 번째 고민보다 두 번째 고민의 우선순위가 더 높은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내가 <행복의 기원> 이라는 책을 읽은 이유가 두 번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사회적으로 살아갈 때 더욱 행복한가? 먼저, 사람이 왜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이 타인을 위해 어느정도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 근시안적인 쾌락이 아니라 조금 더 미래의 거대한 쾌락을 취하려는 미래지향적 태도, 창의력 등도 어찌보면 인간의 생존과 연관이 있었다(참고1,2). 따라서 타인을 돕고, 창의적 사고를 하고, 눈앞의 쾌락을 포기하고 장기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다(sup4).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클럽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할 이성을 찾는 근시안적인 쾌락만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즉, 근시안적 쾌락만 추구할 줄 아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자연선택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우리는 그런 유전자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며 쾌락을 얻어내는 것이 좋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생존한 사람들의 후예이다. 칼로 찌르고 베는 생존의 위협이 상당히 사라진 21세기에도 우리는 그 유전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from1). 그래서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일과 가까워지면 쾌락으로 ‘보상’ 을 받는다. 이런 쾌락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동시에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대충 생각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이 되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 인기가 많아지므로 생존에 가까워지므로 행복할 것이다)*. 오늘날 타인을 돕는 일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사회는 매일매일 클럽에 가고 잘 노는 사람들보다 자기개발을 명목으로 공부를 하고 더 나은 암컷과 수컷이 되는 일이 조금 더 낫다고 평가하는 듯하다. 쾌락을 추구하되 이왕 추구할 쾌락이라면 사회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면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from2).

아무리 열심히 명상을 하고 미라클모닝을 해도 피상적인 행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행복이 찾아오는가. 오히러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데일리 컨디션에 맞지 않는 날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참고3)

명상을 하고 미라클 모닝같은 일을 피상적으로 수행해 내며 뽕에 찬다고 해서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from4)이 행복에 가까워지도록 촉진시킬 수는 있겠지만 행복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오늘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가치의 범위 내에서 다양한 소스로부터의 쾌락을 지속적으로 느끼자. 그래야 장기적으로 나라는 동물의 생존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 쾌락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남을 해하는 사람들을 까내리고, 다른 사람들을 추행하고 하는 일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기적인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인 생존의 유불리가 윤리에 연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자연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몇몇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는 행위는 법이라는 것을 통해 엄격히 통제받는다. 그렇다면 왜 법은 이렇게 세워야만 했을까? 가 더욱 올바른 질문이다.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상황으로 확장해 보자.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게 처벌받는다. 그런데 아동 성폭력의 가해자는 해당 행위를 통해 쾌를 얻는다. 하지만 아동 성폭력 피해자는 해당 행위를 통해 행복에 매우 큰 손해를 입는다. 공리주의자는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얻는 쾌가 아동이 얻는 불쾌보다 월등이 클 때 성폭력이라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볼까 정당하지 않다고 볼까?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 그떠한 구속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 범죄라고 정의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에 의해 인간이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따르면, 폭력이라는 것이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폭력을 옹호하는 사상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고, 이들은 오늘날 범죄라고 정의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에 과학이 고려되었는가?


parse me : 언젠가 이 글에 쓰이면 좋을 것 같은 재료들.

  1. 공리주의적인 자유주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다. 벤담은 윤리적인 쾌락설에 입각하여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주장한 것이다. 쾌락은 선(善)이고 고통은 악(惡)인 것인데, 인간의 본성은 그같은 선인 쾌락을 추구하고 악인 고통을 피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2. 언젠가는 그 회사에서 주는 급식도 그리워질 것이다.

from : 과거의 어떤 생각이 이 생각을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