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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매체와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의 사고력이 떨어지는가

인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학습’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기록 매체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언제든지 선대의 기록들과 지혜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암기의 중요성이 격하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참고1). 이들은 전반적으로 학습암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동시에 암기 교육을 중요시한다(참고2,7:소크라테스).

그런데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다. 논리적이라고 할지라도 문제정의를 단단히 잘못 한 것 같다(from4).

기록 기술 + 정보통신 기술 향상 → 사람들이 암기를 안 함 = 사고수준 및 창의력 감소(참고4)

이러한 사고 흐름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고 문제를 올바르게 재정의(from4)해 보려고 한다. 기록 매체의 발전은 인류가 지식을 쌓아 나가는 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기록 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인류 전체 지식의 총량이 제자리걸음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면(from1) 인간 개인의 학습력기록 매체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암기와 창의성

암기가 무엇인가? 뇌과학적으로 볼 때 ‘암기’는 어떤 모종의 무언가가 ‘서술기억이 되는 것’이다. ‘서술기억’이란 ‘뉴런과 시냅스의 연결’이다(from2). 이때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어떤 형태의 정보든 곧이곧대로 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정보들은 서술기억 및 장기기억으로 옮겨지기 전에 해마에서 폐기처분된다(from3). 무작위 난수를 외우는 작업 등에서 맹목적인 인간의 암기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고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창의성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창의력이든 사고력이든 하는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식의 재조합은 구글 컴퓨터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머리에서 이루어진다(참고5). 즉, 구글 컴퓨터에 저장된 내용을 ‘서술기억’ 으로 충분히 많이 만들어야 창의성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맹목적인 암기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이 어떤 지식을 외워서 서술기억으로 새겨넣겠다고 아무리 굳게 마음먹는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에 의해서 차단당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심장박동을 제어할 수 없듯 의식적으로 우리의 해마를 제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해마 입장에서 생각하기

그럼 이제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 장기기억으로 가는 길의 수문장 해마는 (1)어떤 상황에서 (2)어떤 정보를 신피질로 전달해 넣고 싶어할까?

(1) 차라리 무의식(from6) 넛지(참고3)를 줘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의 해마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야만 한다고 인지할만한 상황이나 환경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from5). 구구단을 외우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혼을 나든(참고2:상황 때문이지 암기를 잘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발표 대본을 암기하지 않으면 당장 나의 사업이 고꾸라지든, 다음날에 전공과목 시험을 보든 … 이런 상황과 환경들 말이다.

(2) 무작위 난수 암기 연구결과가 암시하듯, 해마는 기존에 뇌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와 연결하기 좋은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전환해 넣어줄 가능성이 높다(from7). 우리는 그걸 이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from8). 화학 시간에 주기율표를 외웠던 추억을 떠올려 보자. 왜 우리는 ‘나만알지 펩시콜라’(Na, Mg, Al, Si, P, Si, Cl, Ar) 따위로 원소들의 이름을 외웠을까? 기존에 알고 있던 어휘들에 엮어 외우니 20개가 넘는 원소 이름들이 의미를 부여받고 금방 외워져 버렸다. 연결지어 외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이유는 우리 뇌가 정보를 압축된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우리집 앞 느티나무, 옆집 소나무, 학교 앞 버드나무를 수없이 자주 마주쳐도, 우리 뇌에는 ‘나뭇잎은 초록색, 가지는 대충 삐쭉빼쭉’ 이라는 추상적 정보만 저장된다. 우리의 뇌는 모든 구체적인 정보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둘 수 없다. 그대신 추상(참고8:학술맥락에 따라 chunking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이라는 강력한 압축스킬을 얻었다(from9,10). 우리의 뇌는 어떤 사건에 연관된 장소, 그리고 그 장소의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와 연관된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기억해 버린다.

마치며

이처럼 ‘학습’의 핵심은 **환경, 연결(이해), 압축저장(추상화)**이다. 암기는 이런 본질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고, 문자는 추상화된 지식의 보존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from1). 암기를 잘 하고 싶다고 해서 암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암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잘 하라고 권고해야 한다. 이런 암기의 본질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암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모든 것을 이해하라’ 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세종대학교는 고전독서 인증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고전독서 인증 프로그램은 졸업 전까지 일정량 이상의 고전을 읽고 시험을 통해 독서사실을 인증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시험 족보들을 읽고 가서 문제를 풀어 인증받거나 독서를 대체하는 다양한 활동들로 인증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다. 고전독서시스템을 운영하시는 분들은 ‘고전독서를 기피하는 학생들의 머리가 점점 비어 간다’ 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세종대학교는 왜 고전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가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태하 교수님이 인용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0:30, 세상에 모든 지식들은 전부 인터넷에 업로드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에서 지금 우리는 역사적으로 책이 가장 많은 세상에 산다. 우리는 세상의 그 많은 책들 중에서도 왜 고전을 읽어야 할까? …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의 말을 인용하면, 고전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무용하고, 지식으로 머릿속을 채우기보다는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과 그 능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이 말을 반박하는 관점에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참고6)

이태하 교수님도 강의에서 오마이 겐이치의 말에 반박하며 그 해답으로 암기를 제시한다.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오마에 겐이치의 문제정의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오마에 겐이치는 창의적 문제해결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 하지만 우리가 앞서 논했듯 문자라는 정보전달 매체(“… 책이 가장 많은 세상에 산다.”)와 학습은 별개다. 그리고 그는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기보다는 그 능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추진력” 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인 창의력은 암기로부터 비롯되고, 암기라는 것은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의 주장은 학습의 본질과 완전히 상충된다. 그는 고전을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고, 이태하 교수님도 이에 동의하는 듯하다.